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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0.22 미적분의 역사
- 2014.10.22 수학자 요약
- 2014.10.22 수학이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2013.11.20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 2013.11.20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피타고라스
- 2013.11.18 갈로아(Galois Evariste 1811.10.25~1832. 5.31)
- 2013.11.18 함수의 역사
글
미적분기원
미적분학의 기본적인 개념의 기하학적 의미는
정적분(定積分) - 면적 - 구적법(求積法)
도함수(導函數) - 접선 - 접선법(接線法)
으로 이해되고 있다.
흔히 면적의 개념을 써서 정적분을 정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적분을 써서 곡선의 길이, 도형의 면적, 체적 등이 정의되는 것이다. 또 부정적분은 정적분의 특수한 경우로서, 정적분을 구하기 위한 수단 중의 하나로 이해된다. 미적분학의 역사에서는 적분이 먼저 나타남에 유의해 둘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이미 구적법에서의 수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데, 적분의 아이디어는
구적법에서의 총합을 구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접선이나 극치를 다루는 접선법은 17세기 초에 유럽에서 나타나 여러 가지 문제에 적용되었는데, 이것이 미분법의 기원이 된다.
뉴튼과 라이프니츠가 미적분법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다만 이들이 구적법의 문제가 미분법의 문제의 역임을 지적하여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되어 두 분야 사이의 관계를 확립하고 또 일반적인 계산법과 기호법을 도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하간 이들의 업적은 역사상 너무나 획기적이어서, 후에 17세기를 인류정신사의 영웅적 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미적분의 발견
미분법은 계속적인 변화를 다루는 수학이다. 우리는 여러 현상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을 본다.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 그것들의 방향과 속도, 고도가 수시로 변하며 순간순간 이리저리 날아간다. 바람의 방향과 속도, 나날의 온도와 기압, 그 밖의 자동차나 선박, 비행기 등도 그 때 그 때 흐름의 상태가 변하고 있다.
이 변화의 본질을 외면하고는 과학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자 16세기경부터 많은 수학자들이 개별적으로 이것의 연구에 참여하였다. 마침내 미분법과 그것의 역산인 적분법이 위대한 과학자이며
수학자인 뉴턴에 의하여 17세기 후반에 발견되었는데 그의 운동법칙의 발견에 비하면 작은 업적이나 이것만으로도 그는 엄청난 공헌을 하였다.
10년 뒤에 독일의 라이프니츠(1646∼1716)도 독립적으로 미분법을 발표하였는데 두 이론이 일치하였다. 그것이 성취되기 전 파스칼이나 토리첼리, 드 로베르발, 데사르크스, 페르마 바로(뉴턴의 스승이자 동료), 월리스, 그레고리 같은 수학자들도 미분법의 기초를 닦는 데 기여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파스칼의 논문을 읽다가 문득 미분법의 방법이 머리에 떠올랐다."고 라이프니츠는 후에 진술하고 있다.
◆ 미적분학의 발달
의심할 바 없이 17세기의 가장 주목할 만한 수학적 업적은 세기말로 접어들면서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만든 미적분학이다. 이 발명으로 창조적인 수학은 고등 수준으로 올라서고 기초수학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마감됐다.
고등학교나 대학 교양수학에서 미분을 먼저 시작하고 다음에 적분을 공부하는 관습적인 순서와는 반대로, 역사적으로는 적분학의 착상이 미분학보다 먼저 발달되었다.
적분학의 착상은 어떤 면적이나 체적, 호의 길이 등을 구하는 것과 관련한 합의 과정에서 처음 떠올랐으며, 그보다 약간 늦게 미분학은 곡선의 접선에 관한 문제와 함수의 최대 최소에 관한 문제로 인하여 창조되었다. 그러고 나서 적분과 미분이 서로 역연산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적분학의 발견에 대한 뉴턴-라이프니츠 논쟁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전 시켰다는 의견으로 귀결되었다. 미적분학의 발견은 뉴턴이 먼저, 결과의 출시는 라이프니츠가 먼저하였다.
영국의 월리스와 배로는 뉴턴의 미적분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미적분학의 발전에 대한 월리스의 주요 공헌이 적분론에 있는 반면에 배로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미분론에 관련된 것이다.
뉴턴에 의하여 1671년 오늘날 미분학으로 알려진 <유율법,Method of Fluxions> 이 쓰여졌다. 이 논문에서 뉴턴은 곡선을 점의 연속적인 운동에 의하여 생성되는 자취로 고찰하였다.
이 개념에서 변량(fluent)은 변하는 양, 유율(fluxion)은 변량의 변화 비율, 주유율(pricipal fluxion)은 어떤 변량의 일정한 증가율, 모멘트(moment)는 하나의 변량이 시간이 0인 무한히 작은 구간에서 증가하는 양으로 고찰되었다. 변량으로 부터 유율을 구하는 것은 미분이며 유율로부터 변량을 구하는 것은 적분이다.
뉴턴은 유율법을 수없이 그리고 놀랄 만큼 응용하여 극대와 극소, 곡선의 접선, 곡선의곡률, 변곡점, 곡선의 요철 등을 결정하고, 그의 이론을 수많은 구적법과 곡선의 길이를 구하는 문제에 적용하였다.
미적분법의 발명에서 뉴턴의 경쟁자였던 라이프니츠는 1673년과 1676년 사이에 미적분학을 고안하였다. 그가 카발리에리의 불가분량의 합을 나타내는 라틴어 summa (합)의 첫 문자를 딴 S를 길게 늘인 문자로서 현대 적분 기호인 ∫를 처음 사용하였다. 미분학에 관한 최초 논문은 1684년이 되어서야 발간되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dx를 임의의 유한 구간으로 소개하고 나서 dy를 다음과 같은 비에 의하여 정의하였다.
출처- 네이버지식인
글
피타고라스 [Pythagoras, BC 582?~BC 497?]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의 점을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유클리드 [Euclid, BC 330?~BC 275?]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그리스기하학, 즉 유클리드기하학의 대성자이다. 저서 《기하학원본》은 기하학에 있어서 경전적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유클리드라 하면 기하학과 동의어로 통용되는 정도에 이르고 있다. 그밖에 현존하는 저서로는 《보조론》, 《도형분할에 대하여》가 있으며 응용수학서로는 《구면천문학》, 《광학과 반사광학》, 《음정구분과 화성학입문》이 있다.
아르키메데스 [Archimedes, BC 287?~BC 212]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구에 외접하는 원기둥의 부피는 구 부피의 1.5배'라는 정리를 발견하였다. 지렛대의 반비례법칙을 발견하여 기술적으로 응용하였으며, 그 외의 여러 업적으로 그리스수학을 진전시켰다.
디오판토스 [Diophantos, 246?~330?] 3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그리스의 수학자. 대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마이너스·미지량·상등·거듭제곱 등의 기호를 조직적으로 채용하였다. 저서 《산수론》은 훗날 라틴어로 번역되어 중세말기 유럽으로 전파되어 대수학 발달에 공헌하였다.
프랑수아 비에트 [Francois Viete, 1540~1603.12.13] 프랑스의 수학자. 1591년부터 간행하기 시작한 《해석학입문》에서 대수가 기호적으로 다루어지고 간약의 원리가 사용되었으며 3차방정식을 중심으로 한 방정식의 일반적 취급이 제시되었다. 대수학을 기하학과의 관련에서 파악했기 때문에 문제의 전면해결에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17세기 해석기하학 전개의 기초를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존 네이피어 [John Napier, 1550~1617.4.4] 영국의 수학자. 산술·대수·삼각법 등의 단순화·계열화를 꾀하였으며 연구영역이 '네이피어 로드' 등 계산기계의 고안에까지 미쳤다. 계산의 간편화를 목적으로 한 로그의 발명은 수학사상 커다란 업적이었다. 또한 소수기호의 도입자로서도 알려졌다.
르네 데카르트 [René Descartes, 1596.3.31~1650.2.11] 프랑스의 철학자·수학자·물리학자. 음수개념을 구체화하고 음수를 좌표계상에 표현하였다. 좌표를 도입해 직선상에 양수·음수·영을 나타냄으로써 기하학에 새길을 열었다. 유클리드 기하학 이후 별 진전이 없던 기하학이 다시금 발전한 데는 그의 몫이 컸다. 이때부터 수학이 수의 변화를 나타내게 됐고 미적분학이 태동하는 토대가 마련된다.
피에르 페르마 [Pierre de Fermat, 1601.8.17~1665.1.12] 프랑스의 수학자.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로 손꼽힌다. 근대의 정수이론 및 확률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고 좌표기하학 확립에도 기여하였다.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 1643.1.4~1727.3.31] 영국의 물리학자·천문학자·수학자·근대이론과학의 선구자. 수학에서는 미적분법을 창시하고 물리학에서는 뉴턴역학의 체계를 확립했다. 1665년 이항정리 연구를 시작으로 무한급수로 진전하여 1666년 유분법(플럭션법)을 발견하고 구적·접선문제에 응용하였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7.1~1716.11.14] 독일의 철학자·수학자·과학자·법학자·신학자·언어학자·역사가. 미적분법을 창시하고 미분기호, 적분기호의 창안 등 해석학 발달에 공헌하였다. 역학에서는 활력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위상해석의 창시도 두드러진 업적이다.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1707.4.15~1783.9.18] 스위스의 수학자·물리학자. 수학·천문학·물리학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의학·식물학·화학 등 많은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연구하였다. 수학분야에서 미적분학을 발전시키고 변분학을 창시하였으며 대수학·정수론·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업적을 남겼다.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Karl Friedrich Gauss, 1777.4.30~1855.2.23] 독일의 수학자. 대수학·해석학·기하학 등 여러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겨 19세기 최대의 수학자로 일컬어진다. 수학적 엄밀성과 완전성을 도입, 수리물리학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수학의 길을 개척하여 근대수학을 확립하였다.
드 모르간 [Augustus de Morgan, 1806.6.27~1871.3.18] 영국의 수학자·논리학자·서지학자. 근대적인 대수학 개척자로 알려져 있고 논리학적 측면을 개척하여 선각자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확률론에도 공헌하였다. 드모르간의 법칙이라 불리는 집합연산의 기초적 법칙을 발견하였다.
리하르트 데데킨트 [Julius Wilhelm Richard Dedekind, 1831.10.6~1916.2.12] 독일의 수학자. 저서 《연속과 무리수》에서 무한집합을 고찰하였고 절단개념의 도입으로 연속성을 규정하였으며 무리수 개념을 명확히 하였다. 이데알이라 불리는 집합의 소분해 연구로 대수적 수이론 발전에 공헌하였다.
게오르크 칸토어 [Georg Cantor, 1845.3.3~1918.1.6] 독일의 수학자. 근방·집적점·도집합 같은 개념을 확립하여 실변수 함수론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대수적 수의 집합문제를 논하고 무한집합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분석하여 고전집합론을 창시하고 이의 본질적 부분을 완성하였다.
요한 폰 노이만 [Johann Ludwig von Neumann, 1903.12.28~1957.2.8] 컴퓨터 중앙처리장치의 내장형 프로그램을 처음 고안한 미국의 수학자. 그의 연구는 수학기초론에서 시작하여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설정 등 수리물리학적 과제를 대상으로 하고, 수리경제학과 게임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였다. 1949년 에드박(EDVAC)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컴퓨터를 만들었다.
출처- 네이버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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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수학 [數學]
숫자와 기호를 사용하여 수량과 도형 및 그것들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 즉, 인간의 사유(思惟)에 의한 추상적인 과학으로서, 공리(公理)라고 하는 일군의 명제(命題)들을 가정하여 결론을 이끌어내는 학문.
수학은 본질적인 것만을 파악하여 기호로 표현함으로써 ‘과학의 언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자연과학의 이론·기술의 발전에는 물론 사회·인물·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공헌하는 기초학문이다.
수학의 역사는 오래되어 고대 인도·중국·이집트·바빌로니아 등지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나,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은 그리스문화에서부터이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시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Euclid)는 그 이전의 저서와 연구를 집대성하여
≪기하학원본 Stoicheia≫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유클리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학을 논리적으로 정리, 체계화하였다.
제1권은 수직·평행·평행사변형에서 피타고라스(Pytagoras)의 정리까지, 제2권은 2차방정식의 면적에 의한 해법,
제3권은 원과 호, 호에 관한 각, 제4권은 내·외접 정다각형, 제5권은 비례론, 제6권은 비례론의 도형에의 응용, 제7권에서 9권까지는 정수론(整數論), 제10권은 무리수론(無理數論), 제11권에서 13권까지는 입체기하학에 관한 내용을 싣고 있다.
디오판토스(Diophantos)가 기호를 사용하여 대수문제를 풀기는 하였으나 매우 예외적이며,
그리스 수학 전반은 이론에는 뛰어나지만 수와 계산에서는 큰 진전이 없는 형편이었다.
기호를 사용하는 대수는 인도에서 시작되어 아라비아에서 발달하여 알게브라(Algebra, 代數)라는 이름과 함께 유럽에 전해졌으며, 16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타르탈리아(Tartaglia,N.)와 카르다노(Cardano,G.)가 3차방정식을 해결함으로써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16세기 말경 비에트(Viéte,F.)에 의하여 대수는 미지수를 구하는 방법에서 탈피하여 체계적인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늘날 ‘아라비아 숫자’로 불리는 수의 체계가 발명된 것은 7세기경 인도에서이다.
17세기에 들어와 유럽은 철학·천문학·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혁명의 시대를 맞이하여, 케플러(Kepler,J.)·네이피어(Napier,J.)·페르마(Fermat,P.)·데카르트(Descartes,R.)·파스칼(Pascal,B.)·뉴턴(Newton,I.)·라이프니츠(Leibniz,G.W.) 등에 의하여
수학의 현저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특히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方法序說≫은 해석기하학의 효시로서, 기하학을 대수학과 결부시키는 대수학적 방법을 창설함으로써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근세 산업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운동의 속도나 곡선의 접선, 도형의 넓이·부피를 구하는 문제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미적분학의 발달이 이의 해결을 도왔다.
18세기와 19세기는 17세기에 이루어진 수학이론의 발전시대로서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로는 베르누이(Bernoulli,J.)·오일러(Euler,L.)·라플라스(Laplace,P.S.)·가우스(Gauss,K.F.)·리만(Riemann,G.F.B.)·힐베르트(Hilbert,D.)·코시(Cauchy,A.L.)·볼리아이(Bolyai,J.) 등이 있어서, 현대수학의 발달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대수학은 힐베르트의 ≪기하학기초론 幾何學基礎論≫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혹은 1930년대부터의 새로운 대수계(代數系) 이론의 발전에서부터라고도 하며, 또 부르바키(Bourbaki)에 의하여 대표되는 수학적 구조(數學的構造)의 명확한 등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수학의 다른 부분도 공리화되었는데, 오늘날의 대수학은 인도나 아라비아의 전통을 따르는 계산기술뿐만 아니라 군(群)·환(環)·체(體)·속(束) 등의 대수계에 대해서 논하는 추상대수학이 되었다.
각 대수계는 그 각각의 공리계에 의하여 규정되며, 무정의원소(無定義元素)가 무엇이든 간에 모두 허용됨으로써
광대한 범위에 걸쳐 응용되게 되었다.
또, 그 구성의 기초수단으로는 칸토어(Cantor,G.)가 창시한 집합론(集合論)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과, 집합론이 제기한 역리(逆理)의 해결을 위해서 수학 기초론의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우리 나라에 수학이 도입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수학의 활용은 매우 유서 깊다. 우리 나라 전통수학은 중국 수학을 원형으로 삼은 동양수학이라는 기반 위에 있으면서도, 문화의 차이만큼이나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른 특색을 지녔다.
첫째, 우리 나라는 중국 수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지만 중국 수학의 흐름에 그때마다 발맞추어 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 세종대(1419∼1450)는 수학을 비롯한 과학이 급성장한 시기였으나, 당시의 중국은 명대의 수학 쇠퇴기에 해당된다.
둘째, 우리 나라의 전통수학은 크게 나누어 사대부의 교양으로서 다분히 관념적인 수학과, 재정회계 등 행정상의 실무와 관련된 실용수학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앞의 형이상학적인 기본관념과 뒤의 실천적인 기능은 거의 이질적인 영역이었다.
또, 중국이나 일본에 있었던 민간수학 또는 민간수학자는 우리 나라의 전통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거의 예외없이 관료수학자였다.
따라서, 행정조직 속에서 수학 지식을 다루는 하급 기능직 관리 사이에서 차츰 일종의 길드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산사제도(算士制度)가 줄곧 이어졌던 조선시대에는 세습화된 중인 산학자들 사이에 폐쇄적인 유대가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의 사대부 수학과 중인 수학은 서로 병행하는 위치에 있었으나 말기에는 합류함으로써 수학 자체의 내부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 같은 우리 나라의 전통수학의 특징은 특유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제약, 그리고 이러한 문화현상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속에서 가꾸어진 우리의 의식구조를 반영한 것임을 보여 준다.
- 삼국시대 -
통일신라 이전의 고구려·백제·신라의 수학에 관해서 직접 알려주는 문헌은 없으며,
다만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정도에 그친다.
고구려에서는 373년(소수림왕 3) 중국의 제도를 본뜬 율령정치가 성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과세가 실시되었고 왕실의 출납을 관리하는 주부(主簿)라는 관직도 있었다. 또 소박하나마 과세를 위한 농지측량도 실시되었다.
중국적인 관료조직 아래서의 이러한 행정상의 실무와 관련, 계산업무에 종사하는 관리가 있었음에 틀림이 없고, 이들은 중국 수학책을 통해 다소나마 체계적인 계산지식을 갖추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사기≫ 중의 114년(태조왕 62) 이래 554년(양원왕 10)까지의 사이에 있는 11번의 일식기사는 역 계산을 포함한 조직적인 천문관측활동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으며, 따라서 역법과 관련 있는 분야에서도 수학지식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백제는 제8대 고이왕 당시 이미 중국식의 관제가 도입되었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즉, 260년(고이왕 27) 봄 4월에 재정회계와 창고를 각각 담당하는 관리가 임명되었다.
이 밖에 수학지식을 필요로 하는 관서로 점성 외에 역 계산의 업무를 포함하는 일관부(日官部)와 시장의 관리 및 도량형의 통제를 관장하는 도시부(都市部)가 있었다.
≪삼국사기≫는 기원전 13년(온조왕 6) 이래 592년(위덕왕 39)까지 26회에 걸쳐 백제의 일식기사를 싣고 있다. 중국의 문헌인 ≪신당서 新唐書≫와 ≪주서 周書≫에도 백제 역법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보인다. “백제는 서적을 갖추고 있으며, 중국인처럼 역을 엮었다.”, “송나라의 원가력을 사용하여 1월을 연초로 삼는다.”
간접적이나마 보다 자세한 백제의 수학을 짐작할 수 있는 일본의 문헌인 ≪일본서기 日本書紀≫에 의하면 일본 긴메이천황(欽明天皇) 14년(553)에 일본의 요청에 의하여 백제가 역서와 역의 천문학자를 파견한 적이 있다.
이 사실을 비롯하여 ≪일본서기≫에 실린 당시의 기사는 고대 일본의 역법과 수학이 백제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어 701년(효소왕 10)의 대보령(大寶令), 718년(성덕왕 17)의 양로령(養老令)이 반포되어 중국의 율령제도를 정식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여기에 포함된 산학제도(算學制度)가 당나라 명산과(明算科)의 내용을 반영하게 된 것은 당연하지만 수학교과서의 내용은 중국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 때의 일본 산학의 교과서는 ≪손자산경 孫子算經≫·≪오조산경 五曹算經≫·≪구장산술 九章算術≫·≪육장 六章≫·≪철술 綴術≫·≪삼개중차 三開重差≫·≪주비산경 周祕算經≫·≪구사 九司≫로 되어 있으며, 이 중에는 당나라의 명산과에 없는 ≪육장≫·≪삼개≫·≪구사≫가 포함되어 있다.중국의 수학책을 재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위의 세 교과서 중, ≪육장≫과 ≪삼개≫의 이름은 그 뒤 통일신라의 산학제도에도 나타난다.
고대 일본의 야마토왕조(大和王朝)는 산학을 국학(國學)에 소속시키고, 천문·역법을 음양료(陰陽寮)에서 교수하는 등 형식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 제도의 운영이 백제계 귀화인 및 그 후손들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중국제도에 없는 수학교과서의 출현은 백제 수학의 영향으로 보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있는 “점해이사금 5년(251) 정월에 왕은 한지부(漢祗部)의 부도(夫道)라는 사람이 빈한함에도 불구하고 남에게 아첨함이 없고 공(工)·서(書)·산(算)으로 이름이 알려졌으므로 아찬(阿飡)의 관직을 주어 창고직을 맡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에 관한 유일한 수학관계 문헌이다.
그러나 공물·조세를 담당하는 조부(調部)가 584년(진평왕 6), 그리고 조세와 창고를 맡는 창부(倉部)가 651년(진덕여왕 6)에 설립되었고, 이보다 일찍이 5세기 말(490)에 시장의 관리기관인 시전(市典)이 설치되었으며, 이 관서가 도량형의 제정을 비롯한 물가의 통제 및 매매에 따르는 세금징수를 하였다는 사실은 신라의 관료조직 속에 계산에 능한 기술자가 배치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실제로 최근 1933년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民政文書)에는 4개 촌락에 관한 주위 사방의 거리·호수·인구·전답면적·가축수·뽕나무수 등이 기록되어 있어 회계관리의 업무내용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가 산학제도를 가지게 된 것은 한반도 통일 이후의 일이며, 원시적인 셈이 아닌 체계적인 수학지식이 우리 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은 중국계의 율령정치와 관련된 정치산술로서였다.
따라서 고대삼국이 중국의 정치체제를 본뜬 행정조직을 도입하면서 수학지식에 관해서도 그 나름의 흡수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겠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수학책이 도입되었으며 그것들이 어떤 계층에서 어떻게 연구되었고, 또 어느 정도 보급되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적어도 ≪구장산술≫ 정도는 이 시기에 이미 우리 나라에도 소개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 통일신라시대 -
≪삼국사기≫에 의하면 682년(신문왕 2)에 당나라의 국자감을 본뜬 국학이 설치되었는데, 이 교육기관의 한 분야로서 산학이 있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雜志) 제7에 다음의 기록이 나타난다.
“산학박사 또는 조교 한 사람을 두어 ≪철경 綴經≫·≪삼개≫·≪구장≫·≪육장≫을 교수한다. 모든 학생은 대사(大舍:중앙관서의 17위계 중 제12위)로부터 관직이 없는 자에 이르기까지 지위에 관계없으며 그 연령은 15세 이상 30세 이하까지를 원칙으로 한다.
재학연령은 9년으로 하고 만약 우둔하여 학업을 계속할 가망이 없는 자는 중도에서 퇴학시키고, 미숙한 데가 있으나 능력을 인정받은 자는 9년을 넘는 일이 있어도 계속 재학할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대나마(제10위) 또는 나마(奈麻:제11위)의 관직을 준다.” 신라의 이 산학제도를 당나라 및 일본과 비교해 보면 신라 산학의 독특한 성격을 알 수 있다.
[표 1] 고대 한국·중국·일본의 산학제도
구 분 |
신라 | 당 | 일본(양로령) | 비고 | |
---|---|---|---|---|---|
입학연령 |
15∼30세 |
14∼19세 |
13∼15세 |
| |
입학자격 |
大舍 이하 관직이 없는 자 |
8등품 이하 서민의 자제 |
5위 이상 동서 吏部의 자제 |
당에서는 국자학과 산학( 및 기타의 기술분야)은 자격상의 구별이 있으나, 신라·일본에서는 그 차이가 보이지 않음. | |
교과목 |
제1조 |
육장(또는 구장)·삼개 |
구장·海島·손자·오조·張丘建·夏侯陽·주비·五經算 |
구장(또는 육장)·해도·주비·오조·구사·손자·삼개중차 |
신라의 구분은 중국·일본의 제도로 미루어본 가설적인 것임. 삼국사기에는 네 과목이 구분 없이 나열되어 있음. |
제2조 |
구장(또는 육장)·철술 |
철술·緝古算經 |
철술·육장(또는 구장 |
| |
공통 |
|
數術紀遺·三等數 |
|
| |
수학기간 |
9년, 또는 그 이상 |
7년 |
7년 |
신라의 9년은 국학의 수업연한인데, 산학도 같았는지는 더 검토할 여지가 있다. 수학 [數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표1]에서 신라 산학의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신라는 당나라나 일본과 비교하여 교과목의 수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의 국가행정의 현실에 적응할 수 있는 관수용(官需用) 수리기술에 치중한 현실주의 편제와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이 사실과 관련해서 볼 때 교수요목 중에 ≪철술≫, 곧 ≪철경≫이 들어 있다는 것이 주목을 끈다. 중국의 수학자들도 외면하였던 고도로 다듬어진 이 책의 내용이 현실주의에 뿌리박은 신라의 관영과학의 하나인 산학에서 곧이곧대로 다루어졌으리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아마 그 중의 측량·역법 등과 관련이 있는 초등적인 산법 정도를 소개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천문학분야에서도 수학지식은 필요하다. 749년(경덕왕 8)에 누각박사(漏刻博士)와 천문박사 등을 임명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이들 교수직 밑에 누각생(漏刻生)·천문역생(天文曆生)을 둔 천문제조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 교육과정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알 길이 없다.
또 산경십서(算經十書) 중의 하나이며 동양천문학자들의 필독서이기도 하였던 ≪주비산경≫은 고대 일본의 수학 및 역법의 교과서로 쓰여졌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연히 역생의 양성과정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비산경≫ 중 구고법(勾股法), 즉 직각삼각형에 관한 피타고라스정리는 당시 천문학자들의 상식에 속하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기사 중 적어도 789년(원성왕 3) 이후 911년(효공왕 15)까지의 10회의 기록은 이러한 신라 천문학의 성과임에 틀림없다.
수학의 응용과 관련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신라의 건축이 기하학적 구도의 방법을 이용하였다는 것인데, 건조물에 쓰인 수학지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망덕사지(望德寺址)
① 격자형(格子型)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정수·분수 전개(지면 분할과 탑과의 관계에서 20:10:5:3:1),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사각형과 정삼각형.
(2) 천군리사지(千軍里寺址)
① 격자형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분수비례(지면 분할과 석탑과의 관계),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사각형과 정삼각형.
(3) 천군리사지 쌍탑
① 기본단위와 정수·분수, ② 등차급수적인 점차감소,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길이.
(4) 불국사의 평면도
① 격자형 분할과 그 단위, ② 단위의 분수비례(지면 분할과 석탑과의 관계), ③ 분수와 등분할, ④ 정삼각형과 그 높이,
④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등분, ⑥ 원.
(5) 불국사 다보탑
① 기본단위와 정수·분수, ② 등비급수적인 점차감소(1:2:4:8),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전개,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길이,
⑤ 정팔각형.
(6) 석굴암 평면도
① 기본단위, ② 분수 등분할, ③ 정사각형과 대각선의 전개, ④ 정삼각형과 그 수선의 분할(本尊과 臺座의 크기), ⑤ 등차급수적인 점차감소(본존의 형태), ⑥ 정육각형의 일변과 외접원(굴의 입구와 내부의 평면원의 관계), ⑦ 정팔각형과 내접원(본존 대좌의 구성관계), ⑧ 원과 원주율(窟圓과 아치형천장 구축관계), ⑨구면(아치형천장), ⑩ 타원(입구천장).
(7) 석굴암 석탑
①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 ② 정삼각형과 수선의 길이, ③ 정팔각형과 내접원, ④ 비례중항
그러나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점은 사각형이나 팔각형, 또는 원의 작도 자체보다도 이러한 기법을 써서 전체적인 구성미를 어떻게 창조해 내느냐 하는 데 주력하였다는 사실이다.
≪주비산경≫에 실려 있는 피타고라스정리의 도시[弦圖]는 동양인이 얼마나 훌륭한 기하학적 직관을 지니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중국·한국의 수학에서 도형이 다루어지는 것은 언제나 부피·넓이 등 도형의 측도(測度)에 관한 계산술이 고작이었고 작도의 문제는 수학책에 등장한 적이 없었다.
- 고려시대 -
고려의 산학교육과정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문헌은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산학의 과거시험인 명산과(명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명산업은 2일 간에 걸친 시험에서 산서의 내용을 출제하여 답안을 작성하게 한다. 제1일에는 ≪구장≫ 10조, 제2일에는 ≪철술≫ 4조, ≪삼개≫ 3조, ≪사가≫ 3조를 전부 치르게 한다.
또 ≪구장≫ 10권의 내용을 암송하고 그 이치를 설명하는데, 각 시험마다 여섯 문제씩의 질의에 응하여 여섯 번을 치르고 그 중 네 가지를 통과해야 한다.
≪철술≫은 네번에 걸친 암송 중 2회는 질의를, 그리고 ≪삼개≫ 3권에서 2회의 질의를, ≪사가≫ 3회 중 2회의 질의를 각각 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고려 산학의 중심은 ≪구장산술≫이었고, 당나라의 산학제도에서는 4년의 수업연한을 필요로 하였던 ≪철술≫이 여기에서는 그 비중이 낮아졌다.
그리고 또 ≪구장≫·≪철술≫·≪삼개≫·≪사가≫ 등 명산과의 출제내용이 동시에 산학생 양성에 쓰여진 교과서의 거의 전부였다고 보아도 틀림없을 것이다.
고려 명산과의 내용이 당·송의 그것과는 같지 않고 신라의 산학제도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교과과정면에서도 신라 산학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타당하기 때문이다. 또, 실제로 암기 위주의 시험을 전제로 한 교과 지도의 과정에서 고시과목 이외의 산서를 가르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러나 송대에는 많은 수학서적 중 상당량이 수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산생(算生)들은 과외 독서로 그 밖의 다른 산서도 물론 읽었을 것이다. 명산과의 고시에 관해서는 ≪고려사≫에 “목종 1년(998) 정월에 4인, ……같은 해 3월에 11인 급제”라는 기록이 있다.
[표 2] 각 관서에 배치된 산사의 수 ① 중앙정부
관 서 尙書都省 1 三司 4 尙書考功 1 尙書戶部 1 尙書刑部 2 尙書都官 1 御史台 1 殿中省 1 禮賓省 1 大府寺 1 小府監 1 將作監 1 軍器監 2 尙食局 1 尙藥局 2 中尙暑 1 大官暑 1 掌治暑 1 內園暑 1 司宰寺 2 典廳暑 1 大倉暑 2 大盈署 1 都評議 使司 1 迎送都監 1 刪定都監 1 八關寶 1 內症宅 1
인원
② 외직(서경평양)에 나타난 산사배치
관 서 |
인원 |
---|---|
本廳 |
1 |
儀曹 |
2 |
戶曹 |
2 |
兵曹 |
2 |
寶曹 |
2 |
倉曹 |
2 |
工曹 |
2 |
諸學院 |
1 |
① 산학제도가 통일신라시대의 연장이었다는 것이다. 즉, 당·송의 문물제도를 본받았으나 산학의 내용에 관해서는 통일신라의 것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으며, 중국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없다. 신라로부터 계승된 ≪철술≫이 송대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려와 송나라의 산학제도가 서로 무관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② 수학의 위치가 낮아졌다는 것이다. 당초에는 국자감에 소속되어 있다. 중기 이후 잡과(雜科) 중의 하나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그나마 학문적인 성격을 인정받았던 수학이 순전한 기술로 격하당했음을 뜻한다.
③ 수학이 극히 제한된 특수신분층에서만 다루어졌다는 것이다. 산사(산학자)는 민간과의 접촉이 차단된 내무직이자 특수한 전문직이었으며 수적으로도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또한, 폐쇄된 사회 내에 산사직의 세습화 경향은 수학의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즉, 고려는 신라 이래의 산학을 이어받아 간직하였을 뿐 그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④ 고려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산서를 도입하였다. 산학 고시의 과목 이름 외에 고려에 어떤 수학책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송대의 많은 산서 중 적어도 ≪철술≫을 제외한 산경십서가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며, ≪산학계몽 算學啓蒙≫·≪양휘산법 楊輝算法≫·≪상명산법 詳明算法≫ 등이 들어온 것은 틀림없다. 이를 통해 조선의 수학을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수학의 의의를 다소나마 평가할 수 있다.
- 조선시대 -
[조선 초기]
고려가 망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양전(量田), 즉 농지측량의 제도가 문란하였다는 것이다. 세종대(1419∼1450)에는 이 제도의 확립을 꾀하였고, 이에 따라 통일신라나 고려 초기와 마찬가지로 수학에 대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났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세종 25년 11월 17일 세종의 다음 칙유는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산학은 비록 한낱 기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국가의 행정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것이다. …… 최근 농지를 등급별로 측량하는 데 있어서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 등의 활약이 없었던들 그 셈을 능히 할 수 있었을까. 널리 산학을 익히게 하는 방안을 강구하라.”
수학에 관한 세종의 열의는 집현전교리 김빈(金鑌), 한성참군 우효강(禹孝剛) 등 고위의 문관들까지도 이것을 배우게 할 정도였으며(세종 13년 3월 12일), 한편으로는 총명이 뛰어난 사역원의 직원 두 사람을 골라 수학연구차 중국에 유학시켰다(같은 해 3월 2일).
1433년(세종 15)에는 경상도감사가 ≪양휘산법≫ 100권을 동활자로 인쇄하여 왕에게 바쳤다. 이보다 일찍이 왕은 부제학 정인지(鄭麟趾)로부터 ≪산학계몽≫에 관한 강의를 받았다.
1438년에 제정된 기술분야 10개 교과, 즉 잡과십학(雜科十學)에 관한 교육과정 중에서 산학의 내용은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오조산경≫·≪지산 地算≫의 5개 교과로 되어 있으나, 이 중 ≪상명산법≫·≪양휘산법≫·≪산학계몽≫ 등이 나중에 산학 채용고시의 출제교과서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실렸다.
이 밖에 세종은 산법교정소(算法校正所)·역산소(曆算所) 등을 설치하여 산학의 회복을 위하여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조대(1455∼1468)에는 산학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세종대까지 있었던 산학박사 대신에 산학교수(算學敎授, 종6품) 1인, 별제(別提, 종6품) 2인, 산사(算士, 종7품) 1인, 계사(計士, 종8품) 2인, 산학훈도(算學訓導, 정9품) 1인 등의 관직을 두었으며, ≪경국대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경국대전≫을 보면 산학은 6개 중요 행정부서인 육조 중 호조에 속한다. 호조는 호구·농지·조세·부역·공납·정부미 대여 등의 사무를 관장하는 판적사(版籍司), 중앙 및 지방에 비축되어 있는 화폐·양식 등에 관한 재고조사의 임무를 맡은 회계사(會計司), 왕실 내의 여러 가지 지출을 담당하는 경비사(經費司) 등 국가재정을 다루는 부서들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30인 이상 되는 산원(算員)들이 배치되었다.
≪경국대전≫에는 호조에서 양성하는 산생(算生)의 수가 15인으로 정해져 있고, ≪속대전≫에서는 61인으로 대폭 늘어난 점으로 미루어 행정기구의 확대 및 복잡화에 따라서 계산기술을 요하는 업무범위가 확대된 것만은 확실하다.
관료조직 내의 기술학에 관한 조선 초기의 십학(十學)은 고려의 제도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다. 태조 즉위년(1392)에 의학박사 3인과 조교 2인, 율학박사 2인 및 조교 2인과 함께 산학박사 2인을 두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병(兵)·율(律)·자(字)·역(譯)·의학(醫學)·산학 등의 육학(六學)을 일반 서민층 출신으로 하여금 배우게 하였다.
1406년(태종 6)에는 유학·이학(吏學)·음양풍수학·약학의 4과와 더불어 잡과십학의 교육체제가 성립되었다. 그 뒤 1430년에 이르러 십학에 관한 교육과정이 확립됨으로써 교육내용도 한층 충실해졌다.
그러나 세종대에 완성을 본 이 십학의 교육제도는 다음 대인 세조의 집권이 시작되면서부터 벌써 무너지는 징조를 보였다.
즉, 1465년(세조 11)에는 천문·풍수·율려·의학·음양학·사학·시학 등의 칠학(七學)이 적극 장려되었지만, 세종 당시 그토록 중요시되었던 산학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산학은 성종 때 다시 의·역·율·음양·산·악·화(畫)·도학(道學) 등 팔학의 하나로 나타나게 된다(≪경국대전≫).
이 중 의·역·율·음양학의 4과에는 정식의 과거제도가 있었지만, 산·화·도·악학의 4과에는 각 부서에서 직접 행하는 채용고시인 취재법(取材法)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전체를 통하여 관료조직 내에 있어서의 산학의 위치 격하는 끝내 개선되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실린 천문제도 중 음양과(陰陽科)의 역산 분야의 채용고시과목으로 ≪칠정산내편≫·≪칠정산외편≫이 들어 있다. ≪칠정산내편≫은 수시력을 우리 사정에 맞추어 재편찬한 것이고, ≪칠정산외편≫은 명·원시대의 회회력(回回曆)을 해설한 것으로, 수리에 밝은 정초(鄭招)·정인지·정흠지(鄭欽之)·이순지·김담 등에 의하여 엮어졌다.
정인지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세종에게 ≪산학계몽≫을 강의한 바 있으며, 고려의 천문학자들이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조차 몰랐다고 혹평할 만큼 수학에는 자신이 있었다. 또, 이순지와 김담은 역산의 대가로서, 특히 김담은 이 능력 하나만으로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부정(副正, 종3품)의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천문학(역산) 분야에서도 상당 수준의 수학이 다루어졌음이 틀림없다.
[조선 중기]
산학, 즉 왕도정치하의 관수용 수학은 비상 시국이나 정국의 혼란에서 오는 행정기능의 마비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되는 일은 있었지만, 그 실학적 성격 때문에 국정이 안정되면 관리조직 속에 다시 도입되는 경향을 보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부득이 끊긴 산사의 채용이 전란의 소강상태와 함께 곧 부활한 것은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하나의 예이다.
산학시험의 합격자 명단이자 인사기록부이기도 한 <주학입격안 籌學入格案>에 나타난 일본의 제2차침략인 정유재란을 전후한 5년간의 공백은 아마 1차침략 때의 타격이 겹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592·1597년의 임진·정유 두 차례의 참화는 산학에도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산생 양성의 교과서이자 산사 채용고시의 출제 근거이기도 한 ≪산학계몽≫이나 ≪양휘산법≫마저도 침략군의 약탈에 의해서 왕실의 서고에서 자취를 감추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산생의 양성은 물론 산사의 채용시험조차도 거의 형식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중국 수학사에 있어서의 황금기라고 일컬어지는 송·원대의 수학을 흡수, 소화하였던 세종대를 거쳐서 왜란이 시작되기까지의 약 150년 동안에 조선 수학자의 손에 의해 수학책도 저술되는 등 그런 대로 독자적으로 다듬어진 전통수학이 싹트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실을 실증하는 문헌은 일체 소멸해 버리고 말았다.
세종대 이후부터 양란을 전후한 시기가 한국수학사상 실로 공백의 상태로 남아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일본측의 입장에서 보면 이 침략전쟁은 한반도로부터 반입해 간 산서가 일본 전통수학의 기초를 이룩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문화사상 커다란 계기를 만들었다.
[표 3]은 이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표 3] 임진왜란 후 산서발간상황
조 선 |
일 본 | ||
연 도 |
내 용 |
연 도 |
내 용 |
---|---|---|---|
1660 |
金始振, 산학계몽 중간본 발행 |
1622 |
일본인의 의한 최초의 수학책 割算書 출판 |
1662 |
任濬, 新編算學啓蒙註解 |
1627 |
吉田光由, 塵劫記간행 |
1700 |
崔錫鼎, 九數略저술 |
1657 |
柴村藤左工門, 格地算書 |
|
|
1658 |
산학계몽 復刊 |
|
|
1672 |
星野實宜, 新編算學啓蒙註解 |
|
|
1674 |
關孝和, 發微算法저술 |
잡과십학 중 적어도 천문학·산학·의학·역학에 관한 채용고시는 극도로 난맥을 이룬 문·무과의 경우에 비한다면
기술학의 성격상 거의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경향은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꾸준히 지켜졌다. 이 중 산학은 채용인원의 수로 미루어 시대가 지남에 따라서 그 규모가 확대된다.
조선 중기는 산학의 기술관리직을 독점하는 중인(中人) 산학자의 집단이 형성되는 기틀이 굳어지는 시기였다는 점에서 우리 나라 수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 후기]
(1) 제도상으로 본 산학의 위치
이른바 실학기에 접어들면서 산학제도가 정비되었는데, ≪만기요람 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에는 산생이 될 자격을 다음과 같이 완화하였다.
즉, “구제도에서는 산생이 되기 위해서 국내·국외의 수학책 16종 내외십육파(內外十六派)에 모두 정통한 뒤 비로소 입학을 허락하였으나, 1760년(영조 36) 호조판서 홍봉한(洪鳳漢)의 건의에 따라 16종 중 12종에 통달한 자를 추천하고 시험에 세 번 실패한 자는 천거에서 제외시키도록 정하였다.”
1745년에 공포된 ≪속대전≫에서는 산생의 정원이 종전의 15인으로부터 61인으로 대폭적인 증가를 보인다. 따라서 1808년(순조 8)에 엮은 ≪만기요람≫에는 관료체제 내의 계사(計士) 60인의 업무내용을 [표 4]와 같이 적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조대에 정비된 것으로 보이며, 실질적인 산학의 팽창은 이미 숙종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표 4] 計士의 직무내용과 정원
배치부서 |
정원 |
직 무 내 용 |
---|---|---|
會計司 |
5 |
각 부서, 각도의 錢穀 및 관리의 봉급에 관한 회계 |
版籍司 |
6 |
본 관서 소속의 각 부서에 관한 회계, 호남·호서지방의 토지대장·양곡대장 관리 |
支調色 |
6 |
別例房 소속의 각 부서의 회계, 영남·관북지방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
版別房 |
6 |
본 관서 소속의 각 부서의 회계, 호남·관동지방의 토지대장 양곡대장의 관리 |
解由色 |
6 |
소속된 각 부서의 회계, 경기·관서·강화부·개성부·수원부·광주부의 토지대장·양곡대장의 관리 |
藏幣色 |
4 |
본 관서 및 廣興倉·外都庫의 회계 |
作米色 |
5 |
別營·別庫의 회계, 방출하는 양곡의 대장관리 |
收貢栗色* |
10 |
팔도의 노비로부터의 수공 및 회계문서 관리 |
應辨色 |
4 |
본 관서(외국사신의 접대)의 회계 |
木物色* |
2 |
국용 목재출납에 관한 사무 |
金銀色* |
2 |
본 관서(금·은 제련)의 회계 |
鑄錢所監官 |
2 |
본 관서의 회계 및 鑄錢에 관한 문서관리 |
宣惠廳* |
3 |
전곡의 출납·회계 |
均役廳* |
2 | |
兵曹* |
2 | |
粮飼廳* |
1 | |
禁衛營* |
1 | |
御營廳* |
1 | |
收稅所* |
2 |
강물에 떠내려 오게 한 목재에 대한 10분의 1세를 과하는 일 |
주 : *는 타 부서의 계사가 겸임 또는 파견근무. |
(2) 실학자들의 계몽서 속에 나타난 수학
16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중국을 통한 서양과학과의 접촉이 첫 계기가 되어 일어난 실학파운동은 당연한 결과로 우리의 전통적 과학인 천문학·수학에 대한 재인식을 촉구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자들의 계몽서에는 거의 예외 없이 수학에 대한 그 나름의 언급이 있다.
이규경(李圭景)은 60권으로 된 ≪오주연문장전산고≫ 속에서, 이기(理氣)·성명(性命)에 치우친 중국계의 형이상적인 학문과 오직 궁리(窮理)·측량만을 다루는 서구의 형이하적인 학문을 비교한 데 이어 권9의 기하원본변증설(幾何原本辨證說)에서 기하학의 용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우주의 크기를 재고, 해와 달 기타 별들의 고도가 지구의 지름에 비하여 얼마나 되며, 또 산높이, 누각의 높이, 골짜기며 샘의 깊이,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알아보고, 토지며 성곽·궁실 등의 넓이를 헤아린다.”
전통적인 성리학의 입장을 탈피하고 경험주의를 주장한 최한기(崔漢綺)는 관리채용시 수학을 시험해야 하는 이유로 ≪인정 人政≫ 권17 선인편(選人篇)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즉, “수학에 관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식견을 재어보고 수학적 사고의 여부에 의하여 합리적 태도의 여하를 통찰할 수 있다.”
형 정약전(丁若銓)의 묘비에 “≪기하원본≫을 연구하여 심오한 조예를 지녔다.”고 적었던 정약용(丁若鏞)은 도르래[滑車]의 역학적 구조에 관한 설명을 스스로 시도하기까지 하였다. 황윤석(黃胤錫)과 홍대용(洪大容) 등은 그들의 전집 속에 수학에 관한 장을 따로 두고 있으며, 최석정(崔錫鼎)·최한기·남병길(南秉吉) 등은 따로 수학에 관해 저술하였다.
요컨대, 실학기라고 불리는 16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300년간의 계몽활동기에 수학전문가가 아닌 양반지식층이 수학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는 수학은 남병길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종래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초보적인 단계였다.
(3) 수학자와 수학서
중인 출신 산학자 경선징(慶善徵)의 ≪묵사집 嘿思集≫은 ≪산학계몽≫을 본뜬 수학책이며, 내용도 그다지 독자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다. 다른 중인 산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그의 처지로 보아, 조선 산학의 경전이라 할 ≪산학계몽≫의 해설서 이상의 저술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최석정의 ≪구수략 九數略≫ 속에서 당대 수학의 제1인자로 극찬받고 있다.
영의정까지 지낸 사대부 출신 최석정의 수학저서 ≪구수략≫은 주산·격자셈[格子算] 등 새로운 계산법을 소개하고는 있으나, 내용은 흡사 유럽의 중세수학을 연상시키는 사대부 수학의 대표적인 예이다.
현감·군수를 역임한 임준(任濬)은 ≪신편산학계몽주해≫를 엮었는데 이 책은 문자 그대로 ≪산학계몽≫을 해설한 것이다. ≪조선인명사전≫은 그가 수학에 뛰어났으며, 김시진(金始振)이 그의 도움으로 파본이 된 ≪산학계몽≫을 어김없이 복원할 수 있었다고 적고 있다.
박율(朴繘)의 것으로는 ≪주학본원 籌學本原≫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원본은 볼 수 없으나, 이 책의 복사판 내지는 수정판이 황윤석의 ≪이수신편 理藪新編≫ 중에 ≪산학본원 算學本原≫의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인 산학자 홍정하(洪正夏)의 ≪구일집 九一集≫은 ≪구장산술≫·≪상명산법≫·≪산학계몽≫ 등을 골자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종래의 수학책과 다름이 없으나, 흔히 ‘천원술(天元術)의 책’으로 알려진 ≪산학계몽≫에 실린 내용보다도 훨씬 많은 분량의 천원술 문제가 다루어져 있다는 것이 주목을 끈다.
≪구일집≫의 내용을 축소한 꼴로 이루어진 ≪동산 東算≫이 있으나 이러한 재편집이 홍정하 자신에 의한 것인지, 혹은 후일 다른 사람의 손으로 엮어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전체의 양이 겨우 27매로 된 ≪동국산서 東國算書≫는 실무용으로 엮어진 듯하다. 1718년(숙종 44)에 일어난 기사가 실린 것으로 미루어 18세기 중엽쯤의 판으로 보인다.
유학자로서 대성한 황윤석의 ≪산학입문 算學入門≫과 ≪산학본원≫은 그의 백과사전식 편저 ≪이수신편≫ 중의 일부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산학본원≫의 머리말에는 박율의 수학책 ≪주학본원≫을 근거로 삼아 그것을 수정하였다는 단서가 덧붙여져 있다.
실학파의 학자 중에서도 가장 진취적인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던 홍대용의 ≪담헌서 湛軒書≫ 외집 권4는 수학을 다룬 <주해수용내편 籌解需用內編>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통적인 수학, 주로 ≪산학계몽≫에 ≪수리정온 數理精薀≫의 내용을 가미한 수학지식의 일상화·사회화를 꾀하였다.
최한기의 ≪습산진벌 習算津筏≫ 역시 ≪수리정온≫을 다분히 참조하면서도 내용은 홍대용의 ≪주학수용≫에 비하여 극히 고색이 짙고, 수학수준도 낮다.
본격적인 수학활동으로 주목을 끈 것은 남병길·이상혁(李尙爀)의 저술이다. 이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지낸 남병길은 여느 양반 지식인과는 달리 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였으며, 이상혁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당대 최고의 수학수준에까지 이르렀다.
옛 산서에 있는 측량술에 관해서 그림으로 설명을 붙인 ≪측량도해 測量圖解≫·≪구고술요도해 勾股述要圖解≫,
그리고 ≪구장산술≫을 해설한 ≪구장술해 九章術解≫ 이외에 그의 본격적인 저술인 ≪산학정의 算學正義≫ 상·중·하 3편과 <무이해 無異解> 등이 있다.
≪산학정의≫는 천원술·대연술(大衍術) 등의 전통적인 수학과 ≪수리정온≫의 새 수학을 아울러 깊이 다루었으며, <무이해>는 서양의 대수방정식의 해법(借根方)과 동양전통의 천원술이 같은 내용의 것이라는 점을 밝히는 논문이다.
중인 산학자인 이상혁은 ≪익산 翼算≫·≪차근방몽구 借根方蒙求≫·≪산술관견 算術管見≫ 등 독자적인 연구를 담은 저술을 하였다. 이상혁이야말로 중국계의 전통수학에 얽매였던 종래 수학자와는 달리 스스로의 경지를 개척한 유일한 우리 나라 수학자였다.
이밖에도 실학기, 특히 후기에 갈수록 많은 수학서가 저술 또는 편저된다. 현재 각 도서관의 고서목록에 있는 필사본들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 실학기의 수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수학활동의 발전단계에 관해서는 ① 중인 산학자 사이에서의 의욕적인 수학연구 및 저술활동(예:홍정하의 구일집), ② 실학자 스스로의 수학서 저술(예:홍대용의 주학수용), ③ 이른바 사대부 수학과 중인 수학의 합류(예:남병길과 이상혁의 공동연구 및 저술활동), ④ 유럽수학에의 접근 및 한국수학의 독자적 발전의 계기(예:이상혁의 산술관견)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수학 연구태도의 변화에 관해서는 ① 수학서를 경전시하였던 전통적인 경향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즉, 사대부 수학에 나타난 고전화의 경향은 기실 그 내용을 보면 옛 산서를 소재로 하여 새로운 방법을 제기한다는 형태로 나타났다.
② 백과사전적인 교양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전문적인 독립과학으로서의 수학이 차츰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수학책의 저술이 현저히 많아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경향을 충분히 뒷받침한다.
[개화기]
1895년(고종 32)부터 실시되기 시작한 신제도에 의한 학교교육 속의 산술(또는 수학)은 내용이 전면적으로 유럽식으로 개편되었다.
산학은 이제 한국수학사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새로 제정된 <소학교령>에 의하면 심상과(尋常科) 3년, 고등과 2년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 산술교육의 목표 및 내용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즉, “일용계산을 익히고 동시에 사상을 정밀히 하고, 유익한 지식을 주는 것을 요지로 삼는다. 심상과에서는 처음에 10 이하의 수에서 시작하여 1만 이내의 범위에서 가감승제와 통상소수(通常小數)를 교수하는 것이 가하다. 심상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행하지만 그 병용은 지역의 사정에 의해서 정한다.
고등과에서는 필산과 주산을 병용하고 주산에 있어서는 가감승제의 연습, 그리고 필산에서는 도량형·화폐·시각에 관한 계산문제로부터 점진하여 간단한 비례문제와 통상의 분수 및 소수를 교수하지만 수업연한에 따라 더 복잡한 비례문제까지 취급하여도 가하다.
산술의 교수는 이해력을 정밀히 하고 운산(運算)에 익숙하여 그것을 자유로이 응용할 수 있도록 힘쓰고, 또 정확한 말로 운산의 방법과 이유를 설명하고, 겸하여 암산에도 숙달하게 함을 요한다.”
한국수학사상 이때 비로소 필산과 주산이 교육기관을 통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해에 전통적인 유학교육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성균관(成均館)도 교육과정의 개편을 단행하여 이수과목 중에 산술을 두었다.
사범학교(1895년 설립)와 중학교(1899년)에서는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산술 이외에 대수와 기하를 교수하였다. 당시 쏟아져 나온 수학책(대부분이 교과서) 중 현재 남아 있는 몇 권의 책을 통해서 개화 말기의 수학을 엿볼 수 있다.
≪정선수학 精選數學≫(1900)은 일본에서 엮어진 유럽계의 ≪신수학≫을 재편집한 것이며, 계산의 사칙부터 기하·삼각법·측량 등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산술신서 算術新書≫(1900)는 세로쓰기로 된 ≪산술신서≫에 비하면, 수식을 포함하여 모두 가로쓰기 형태로 표시되었다는 점에서 그만큼 유럽형태에 접근하고 있다.
≪신정산술 新訂算術≫ 3권은 1895년의 <소학교령>에 의하여 엮어진 심상과(3년 과정)의 교과서이며, 아라비아식 기수법에 관한 설명에서 시작하여 정수(자연수)의 계산사칙과 그 응용을 다루고 있다.
≪산학신편 算學新編≫ 상·하권은 대한예수교 발행인 중학교과과정용의 번역판이다. 내용은 도량형·시간·순환소수·비례산·백분율·세금·평방근·입방근·등차 및 등비급수·면적·체적계산·평면기하 등이다.
≪산학통편 算學通編≫ 상·하권도 중학교용 교과서로 분수·소수·비례·개방·급수(등차·등비)·구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며, 증명법을 도외시하는 종래의 계산수학이 여전히 배경에 깔려 있다.
≪초등산술교과서≫ 상·하권은 일본에서 인쇄된 양장본이다. 이 책의 저자 유일선(柳一宣)은 우리 나라 최초의 수학잡지 ≪수리잡지 數理雜誌≫를 1905년 11월부터 1906년 9월까지 8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개화기 수학의 특징은
첫째, 겉으로는 유럽계의 수학을 수용하면서도 내용면에서는 여전히 종래의 수학관이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정리의 증명 따위는 외면한 채 결과에 치중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둘째, 수학의 보급이라는 점이다. 1908년 전국 5,000개 학교에서 20만의 학생을 수용하였다는 통계를 그대로 따른다면, 당시 수십만명이 수학교육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교육 속의 수학이었고, 앞서 말한 남병길·이상혁 등에 의한 진지한 수학연구활동은 이 신식수학에 억눌려 그 후계자를 잃게 되었다.
이상 조선 말기까지의 우리 나라 수학을 돌이켜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공통성을 찾아볼 수 있다.
① 수요면에서의 성격으로 보아 우리 나라 수학은 관영과학이었으며, 민간수학은 거의 싹트지 않았다.
② 수학자의 교양적 배경에 관해서는 다분히 유교적 사상의 지배를 받았으며, 수학을 경전시(經典視)하는 경향이 있었다.
③ 관영과학의 성격상, 전통적인 형이상적 수리사상(數理思想)이 공존하였다.
④ 수학이 중인 산학자들의 집단에 의해 거의 독점되었으며, 따라서 학문상의 자극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⑤ 수학의 사회적 효용이 유럽적 의미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라기보다 행정조직 속의 하부관료가 맡는 기술[雜學]이었다는 사실은 진지한 수학연구에의 의욕을 둔화시켰다.
- 근대 이후 -
조선 후기에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 수학이 잇달아 도입되었으며,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학교가 설립되어 각급 학교에서 수학과목을 교육하였고, 교과서도 1900년에서 1911년 사이에 14종이 나왔다. 이 시기에는 이상설(李相卨)·이상익(李相益) 등이 유명하였고, 일제강점 후에는 최규동(崔奎東)·안일영(安一英)·유일선(柳一宣) 등이 교사로서 활약하였다.
도입단계에 지나지 않았던 수학은 민족항일기에서 학교교육을 위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일제하의 우리 나라 수학연구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에서 교육 위주로 명맥을 유지하였고, 1938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의 설립 정도가 기록될 뿐이다.
실제로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서의 교육은 중등교원 양성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였으며, 이춘호(李春昊)가 첫 한국인 수학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이 때 일본에서 동경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최윤식(崔允植)이 경성광산전문학교 교수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당시에는 장기원(張起元)이 연희전문학교에 재직하였다. 이 밖에 다수의 중등교원이 있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 현대 수학의 전개는 8·15광복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광복 이후 초창기에서 1950년대까지의 제1기와 1960년대의 유학 및 구 학위제도의 제2기, 1970년대 후반 이후의 제3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은 한국수학회의 발전과정과 맥을 같이한다.
광복 후 1945년에 경성대학 이학부 수학과가 개설되어 이듬해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수학과로 개편된 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대학 수학과이다.
이 때의 교수진은 최윤식·이임학(李林學)·유충호(劉忠鎬), 강사에 박정기(朴鼎基)·박경찬(朴敬贊)·신영묵(辛永默)으로 구성되었으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수학교실은 박경찬·정봉협(鄭鳳浹)·이정기(李廷紀)로 이루어졌다.
1948년에는 대구사범대학에 오용진(吳龍鎭)을 중심으로 하여 수학과가 개설되었고, 1949년에 연희대학의 수물과에서 수학과가 분리되어 장기원·박정기가 중심 교수진으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의 대학 수학과에서는 고전적인 해석학, 미분기하학 및 현대대수학을 강의하였다.
한편, 1946년 10월에 대한수물학회(大韓數物學會)가 창립되었으며, 여기서 분리되어 1952년 10월에 대한수학회(大韓數學會)가 창립, 초대 회장에 최윤식이 취임하였다.
1948년의 연구발표회에서는 최윤식이 푸리에급수(Fourier級數), 장기원이 산목(算木)을 이용한 호너(Horner,W.G.)의 방법을 발표하였고, 이때 이미 이임학은 미국수학회지 ≪Bulletin of the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에 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캐나다에 유학하여 단순군(單純群)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부산의 전시연합대학을 거쳐서 여러 사립대학과 지방의 각 국립대학에 수학과가 설치되어 수학을 전공하는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1954년에 대한수학회의 기관지로 ≪수학교육 數學敎育≫ 제1집이 발간되었으며, 1957년과 1958년에 제2집과 제3집이 발간되었다.
이 무렵부터 각 전문분야별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경북대학교에서는 1958년에 ≪The Kyungpook Mathematical Journal≫이라는 영문논문집을 창간하여 우리 나라 수학계의 획기적인 연구활동의 계기를 마련, 현재까지 계속 간행하고 있다.
또한, 1950년대 말에는 6·25전쟁 이후에 유학한 이임학·임덕상(林德相)·윤갑병(尹甲炳)·권경환(權景煥) 등이 학위를 받았고, 국내에서 취득한 최초의 박사학위는 최윤식이 받았다.
제1기의 우리 나라 수학계는 최윤식을 중심으로 연구,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제2기인 1960년대는 도약기라고 할 수 있다. 다수 유학자들의 귀국과 국내 박사의 배출로 연구활동이 활발해지고, 대학교 수학과의 양적 팽창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4년 4월에 대한수학회지 ≪수학 數學≫ 제1권이 발간되어 제4권까지 계속되고, 1968년에 회지와 회보로 분리되어 각각 제5권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대한수학회지≫는 구문(歐文) 논문집이며, ≪대한수학회보≫는 국문과 구문공용이지만 현재 논문은 모두 구문으로만 싣고 있다. 이때부터 외국학자들과의 교류도 활발해졌으며 회지에는 외국학자들의 논문도 실리게 되어 국제적으로 발돋움할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국내 박사학위 취득자가 양산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제3기인 1986년 사이에 각 대학에서 배출하는 수학도의 수는 매년 수천 명에 달하였고, 대학교수 및 연구직에 있는 수학회 회원수도 700여 명으로 늘어나 방대한 연구인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분야도 늘어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연구활동을 진행하게 되었으며, 1981년 9월에는 대한수학회가 국제수학연합(IMU)에 가입하여 국제적인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 뒤 연구논문의 질적·양적인 팽창으로 기존의 ≪대한수학회보≫는 구문논문집으로 돌리고 1986년에 ≪대한수학회논문집≫을 새로이 창간하여 국문과 구문의 공용 논문집으로 발행하고 있다.
학문분야별로는 크게 해석학·대수학·미분기하학 및 위상수학 분야에서 국제적인 워크숍과 집단별 연구회를 통하여 활발한 연구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종래의 물리학·공학뿐 아니라 여러 학문 분야에까지도 수학적 방법이 이용되어 계량심리학(計量心理學)·수리언어학(數理言語學)·수리생물학(數理生物學)·계산정치학(計算政治學)·계량경제학(計量經濟學) 등의 새로운 분과가 생겨나고 있으며, 현재 수리과학이라 불리고 있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분야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수학계가 순수분야에만 매달려 있을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응용분야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응용수학도를 양성하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라 생각된다.
글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그레고리력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율리우스력 1642년 12월 25일~1727년 3월 20일)은 영국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광학자, 자연철학자이자 연금술입니다. 아이작 뉴턴은 청교도혁명이 일어난 해인 1642년 1월 4일 영국 링컨셔(Lincolnshire)의 울즈소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으로는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 외삼촌, 형제들이 있었는데, 외삼촌은 교구에서 사목한 성공회 신부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작은 규모의 땅의 지주였으며 뉴턴이 태어나기 전에 죽었는데, 태어날 때 몸이 약해서 산파들이 따로 아기에게 먹일 약을 구해 올 정도였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뉴턴이 3살 때 대지주인 바나바 스미스와 재혼했는데, 뉴턴은 훗날 뉘우치기는 했지만, 어머니와 새아버지를 매우 미워했습니다.
조카가 과학에 재능이 있음을 알아본 외삼촌이 어머니를 설득한 덕분에, 뉴턴은 1661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후에 대학교 학장이자, 대학교 내 성공회 교회의 주교가 되는 버로우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뉴턴은 버로우 교수가 진로문제를 어떻게 할 결정할 것인지 물어보자, 역학 (물리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답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뉴턴은 대학생 시절부터 프랜시스 베이컨과 르네 데카르트 등 초창기 과학자의 저작에 주석을 달았으며, 이항정리를 발견하여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인정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기하학과 원자론을 접했으며 연금술의 근본 사상이었던 헤르메티시즘을 접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뉴턴이 평생동안 연금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667년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뉴턴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 반사 망원경을 만들었습니다. 이 공로로 뉴턴은 1672년 왕립학회 회원으로 뽑혔습니다. 이보다 앞선 1669년 스승 버로우 교수의 뒤를 이어 모교의 수학과 교수가 되어 미적분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수학의 발견에 대해서 라이프니츠와의 우선권 문제로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1675년 박막의 간섭 현상인 뉴턴 환을 발견하였는데, 여기서도 그의 '빛의 입자설'과 네덜란드의 호이겐스가 발표한 '빛의 파동설'의 엇갈린 주장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논쟁이 계속되었습니다.
만유인력의 구상은 오래전부터 싹텄으나, 케플러의 혹성 운동에 관한 3가지 법칙, 갈릴레이의 지상 물체의 운동 연구, 호이겐스의 진동론 등을 종합·통일하기 위하여 이론적 연구에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물체 운동 및 만유 인력의 기초 법칙을 2대 지주로 하는 이론 역학을 세운 것은 그의 저서 《프린키피아(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였으므로, 착상 이래 20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뉴턴은 1684년 핼리 혜성을 발견한 것으로 유명한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와 행성운동에 대해서 토론할 정도로 천문학에도 식견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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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으며, 수학에 기여한 공적이 매우 커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 것이며, 그의 증명법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에게해 사모스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므네사르코스(Mnesarchos)는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 에게 해 등지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는 상인이었으며 아들이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어려서 부터 리라 연주와 그림, 운동을 배울 수 있도록 하였고 긴 여정의 장사길에 함께 데려가기도 하였다. 이후 피타고라스의 스승이었던 탈레스(Thales)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유학을 떠나 23년간 수학하였으며,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 크로톤섬에 학술 연구 단체이면서 수도원 성격을 띤 최초의 철학공동체를 결성하였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영혼의 윤회사상을 가르치며 육식을 금하는 채식주의를 따랐고 백색의 옷과 담요를 사용하였다. 그후 메타폰티온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온화, 겸손, 과묵을 덕목으로 추구하였으며 신들과 양친, 친구, 계율에 대하여 절대적 신실, 자제, 복종을 설파하였다.
그의 종교적 교의는 윤회와 사후의 응보로서 동시에 인간과 동물과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육식을 금하였다. 이론적 방면의 연구에서는 음악과 수학을 중시하였는데, 음악에서는 일현금에 의하여 음정이 수비례를 이루는 현상을 발견하고 음악을 수학의 한 분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저서를 남기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의 업적이 그 자신의 것인지 또는 초기 제자들의 것인지의 구별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의 단편에 의하여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로 보았다. 그 수는 자연수를 말하는 것으로 이들 수와 기하학에서의 점을 대응시켰다.
예컨대 자연수 계열의 연속항의 임의의 항까지의 합은 삼각형수이고, 마찬가지로 기수계열의 합은 정사각형수, 우수계열의 합은 직사각형수라는 방법으로 정의하였다. 또 완전수, 인수의 합, 비례와 평균의 연구, 상가평균, 조화평균 등도 분류하였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오늘날의 그 정리의 증명법은 유클리드에 유래한다).
그런데 이의 정리에서 의외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정사각형의 한 변과 그의 대각선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이다. 이 경우 대각선의 길이는, 한 변을 1이라 할 때 √2가 되어 약분이 불가능한 무리수가 된다. 이것은 자연수만을 수로 생각한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에 있어서는 극히 난문제였기 때문에 수로부터 제외시켰던 것이다. 또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임의의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직각(180°)과 같음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였다.
'플라톤의 다면체'로 불리는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팔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십이면체는 정오각형의 작도를 필요로 하지만 한 선분을 중외비로 끊는 문제로 환원시켜 이 작도에 성공하였다. 이 정오각형에서 생기는 성형오각형을 그의 교단의 휘장으로 채택하였다고 한다. 피타고라스가 수학에 기여한 공적은 매우 크며, 그의 영향은 플라톤, 유클리드를 거쳐 근대에까지 미치고 있다.
천문학에서는 지구가 구형임을 확신하고,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공전함을, 지구 자전으로 인한 낮과 밤의 생김, 기울어진 자전축으로 인한 계절의 변화가 생김을 이미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다른 과학자들에 밀려 1000여년 간 다른 학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6세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인해 과학혁명의 최초에 피타고라스가 있었음이 인정되었다. 피타고라스에 의해 우주는 코스모스(Cosmos)로 불려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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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프랑스의 천재적 수학자
群의 생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소수차의 기약방정식이
가감승제와 거듭제곱근을 써서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조건을 찾아냈다.
그의 업적은 21세 때 연애사건으로 인한 결투(죽음)의 전야 친구 Auguste Chevalier에게
보내는 서신에 씌여있다.
분방한 천재로서 바보스러운 행동에 몸을 내 던진 자기만족족인 교육자나 뻔뻔스러운 정치가,
자만심 많은 학자들에 대해 경종이 될 수 있는 수학자
1811년 10월 25일
파리 교외 Bourg-la-Reine(부르 라 레느)에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갈루아 생애의 처음 11년은 교양도 있고 철학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법률가 출신의 어머니 밑
에서 정있고 사랑받는 생활로 행복했다.
1823년(12세)때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완연한 시대여서
그다지 좋지 못한 환경에서 전제의 실상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더 해 공부에 흥미를 잃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독파하여 초등기하학을 정복하였고 당시의 대수학책을 창조적인 필치가 결여 된 책이라 생각하여 무시하고 라그랑주 학자에게 직접 대수학을 배우고 대수학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평범한 수업은 수학의 천재에게는 쓸데 없는 것이었고 참다운 수학을 위해서는 불필요 하기도 했다.’ 거의 머리속에서 어려운 수학 탐구를 해 치우는 갈루아의 재능은 교사나 시험관에게는 알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독창성을 ...’ ‘구원 하기 어려울 만큼 건방지다.’ ‘수학적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를 수학만 하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한 교사들의 말이 의미가 있다.
1827년(16세)
자기 나름대로 수학을 하던 갈루아는 1827년(16세) 자신의 수학적 능력이 인정되고 최대한
발휘하려는 의도에서 파리 고등 이공과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루었으나 실패한다.
이를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에 ‘지력이 뛰어난 수험새생이 지력이 떨어지는 시험관에 걸려서 떨어 졌다. ....’ 라고 지적한 경우도 있다.
1828년(17세)
자기를 이해해 주는 루이 르 그랑 학교 교사 루이 폴 에멜 리샤르를 만나 공부를 하면서 여러
가지 연구에 힘을 쓴 결과
1829년 3월 1일
갈루아는 循環連分數(continued fractions)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여 급우들에게 본인이 독창적인 수학자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 갈루아는 그때 까자의 중요한 논문을 정리(方程式論에 관한 논문)해서 프랑스 科學院에 제출 하였지만 심사관 코시가 그 논문뿐만 아니라 논문의 요약 마저 잃어 버렸기 때문에 발표되지는 못 하였다. 이러한 이유등으로 사회 전체에 증오를 느끼게 된다.
1829년(18세)
또 두가지 불행이 그 에게 닥쳐온다.
첫째, 두 번째 파리 고등 이공과학교에 입학시험 - 머리속에서 연구하는 갈루아와 칠판앞에서 의 시험 - 실패하여 이 학교와는 인연이 없어 진다.
둘째,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 - 반 승려 투쟁으로 인한 승려들의 음모등으로 -이로 인하여
갈루아는 무슨 일이든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 Ecole Polytechnique의 입학시험에는 실패하고 Ecole Normal에 입학했다.
1830년(19세) 2월
갈루아는 큰 상을 받을 목적으로 세가지 논문을 써서 학사원에 보냈으나 역시 분실되는 사건이 생긴다. 갈루아는 이 논문을 ‘나는 많은 수학자들의 연구를 단념시킬 만한 연구 ... ’라 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입증 되어 진다.
‘논문의 원고는 학사원 간사 앞으로 확실히 보내졌다. 간사는 검토하기 위해 집으로 가져갔으나 그것을 볼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죽은 후 논문을 찾아 보았으나 그것은 흔적도 없었다.’
이를 우발적이라고 보다 어떤 숙명적인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 갈루아의 증오는 쌓여서 결국 공화주의 편에 서서 정치에 뛰어 들게 되었고 금지된 과격주의자로 나아간다.
1830년 7월
- 7월 혁명이 터지자 갈루아는 환호 했다.
그는 대중의 권리를 격렬히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교장의 기회주의, 학교 급우들의 굴욕적인 무기력 등을 비난하는 글을 학교 신문에 실어 이로 인하여 퇴교 처분을 받는다.
즉, 정치운동에 참가 했다가 퇴학
이후 국민병 포병대에 들어 갔다. 여기에서도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필사적인 시도로서 방정식에 관한 일반적인 해법에 관한 논문(‘갈루아 이론’)을 학사원에 보냈으나 ‘이해 하기 어려운 논문’이라는 것으로 끝 이었다. 이에 대해 갈루아는 ‘인민을 궐기 시키는 데 생명이 필요 하다면 이몸을 바쳐도 좋다’라고 썼다.
1831년 5월 19일
그에게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포병대에 대한 해산명령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젊은 병사들의 술 자리에서 현세를 비난하는 ‘루이 필립을 위해 건배, 변절하는 새벽에 !’라는 구호로 축배를 든 것을 계기로 다음날 체포되어 생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변호인의 적절한 변호와 법정에서 정치적 부정의 공격 등을 격렬히 비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사리를 분별해서 인지 무죄판결을 받는다.
1831년 7월14일
당국의 눈에 ‘위험분자’로 비쳤기에 고발도 없이 구금되어 죄 아니 죄(당시 해산된 포병 군복 불법으로 착용)로 유죄 판결을 받아 6개월의 금고를 받아 생 펠리지 감옥에서 복역 하다가 1832년 콜레라의 만연으로 3월 16일 병원으로 옮겨 졌으며 외출이 허락되어 바깥 세상을 볼 기회가 자주 있었으며 이래서 일어난 일이 그의 생애에 단 한 번 있었전 연애사건이다. 천한여자에게 끌리게 되고 격렬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가 마침내 연애에 대해 그리고 자기와 그 여자에 대해서 혐오를 느꼈다. 이후 1832년 5월 29일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되자 곧 정치적인 적과 충돌 했다. 이들 ‘애국자’들은 시종 결투를 요구하기 마련이었고 불우한 갈루아가 ‘명예’문제로 여기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1832년 5월29일자 ‘모든 공화주의자 에게 고함’이라는 편지를 보면
‘내가 조국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죽더라도 애국자 여러분이나 친구 여러분은 비난하지 말라. 나는 염치없는 요부의 덫에 걸려 죽는다. 내가 죽는 것은 하잘 것 없는 싸움이다. ...’
또 다른 편지에는 ‘나는 두 애국자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거부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 모든 방법을 다해 타협하고자 노력해 본 끝에 결투에 나섰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를 바란다. ... 끝까지 친구로서 죽는다...’ 이상이 갈루아가 남긴 최후의 말이다.
두 번이나 투옥 되었다가 가출옥 중, 연애사건으로 결투를 해서 겨우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결투하기 전날밤 그는 죽음을 예견하고 친구인 A. Chevalier에게
자기가 연구한 내용의 대강을 써서 남겼다.
위의 편지를 쓰기전에 그 날 밤 새도록 학술상의 유서를 쓰는 데 몰두하고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지나가는 몇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달아 오르는 두뇌를 가지고 조금이라고 업적을 남기려고 시간과 경쟁하면서 쓰고 또 썼다.
후에 J. Liouville이 이 원고와 稿種(고종)들을 정리하여
“J. Math. Purses Appl.,11”에 게재했다.
그것은 群의 개념을 도입하고 대수방정식에 관한 Galois이론을 실질적으로
포함한 내용이었으며, 마찬가지의 생각을 Abel 積分의 문제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832년 5월31일 이른아침 갈루아는 ‘명예의 들판’에서 적과 대결 하였다. 결투는 25보 간격에서 피스톨로 행해졌다. 갈루아는 배를 관통당하여 후에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결국은 21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남쪽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거기에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묘는 흔적도 없다.
그의 영원한 기념비는 전집이다. 더구나 그것은 겨우 6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갈로아의 이론[Galois Theory]
1824년 아벨은 일반적인 5차이상의 방정식을 사칙과 거듭제곱으로 푸는 일, 즉 대수적으로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831년 갈로아는 根 사이의 치환군과 數体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하고 대수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구하여 대수방정식의 대수적인 해의 존재에 관한 연구에 결정적인 해답을 주었다. 갈로아의 연구는 대수학의 가장 아름다운 이론의 하나로서 갈루아의 이론이라 불린다.
‘소수 차수의 기약 방정식이 근 기호 만으로 풀 수 있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그 모든 근이 그 중 두 개의 유리함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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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라는 용어가 수학에서 쓰여진 것은 17세기였으며, 함수의 개념은 라이프니츠(Leibniz, G.W.;1646-1716, 독일)에 의하여 처음으로 확립되었다.
17세기 이전에도 프톨레마이오스(Ptolemaeos, K.; ?-?, 그리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삼각 함수적인 표가 있었다. 이것은 함수 개념의 발달에 필요한 운동, 변화, 무한성이라든지, 두 양 사이의 상관적인 관계를 통한 법칙성의 발견이라는 입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또한 르네상스 이후에 코페르티쿠스(Copermicus; 1473-1543,폴란드), 케플러(Kepler, J.;1571-1630, 독일), 갈릴레이(Galilei, G.; 1564-1642, 이탈리아)등은 이미 그리스 수학에서, 운동이나 무한에 대해서 회피하였던 것을 운동이나 무한은 물론 상관에 대해서도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관찰이나 실험이 주된 것이어서, 수학의 분양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확히 다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라이프니츠는 '변수 x의 값의 변화에 따라서 다른 변수 y가 정해진다면, y를 x의 함수'라고 정의하였고, 함수와 곡선을 같은 것으로 보아 곡선이 함수를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1694년에 함수라는 것은 방정식에 의하여 표시되는 사실이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함수 관계를 그림이나 식의 어느 쪽으로 나타내어도 무방한 것이라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연구 방법은 주로 기하학적인 것이어서, 그림을 통한 직관적인 판단이 선행되었으므로 논리적 엄밀성이 결여되었고, 증명도 완벽하지 못하였으며, 함수라는 용어도 막연한 것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역학을 다루는 범위가 광범위하여 지자, 탄성체, 유체와 같은 연속체의 역학과 그에 따른 천체 역학 등이 탄생되니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적분의 연산에 대한 짜임새를 최대한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러 외형적으로는 현재의 해석학과 비스소한 단계까지 발달되었으며, 자연과학에 있어서 강력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세기의 가장 위대한 수학자인 오일러(Euler, L.;1707-1783, 스위스)는 '변수와 상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해석적인 식'이라고 함수를 정의하여, 함수를 그림과는 분리된 해석적인 표현을 하게 되었으나, 오일러는 임의 함수를 정한 것이나 실제로는 해석적인 함수에 한정되어 있었다. 19세기는 종래의 해석적인 함수에 대한 비판적인 시기였다.
디리클레(Dirichlet, P.;1805-1859, 프랑스)는 '두 변수 x, y에 있어서 x의 값을 정하면 그에 따라서 y의 값이 정하여질 때, y는 x의 함수이다.'라고 함수를 정의 하여, 라이프키츠의 함수에 대한 개념을 뒤덮고 함수는 식 표시 이전의 것이라는 데에 처음으로 주목하였다. 그는 분명히 y를 식으로 나타낸다는 종래의 입장을 벗어나 대응이라는 생각을 표면에 들어내고 있다. 오늘날에는 그의 정의를 더욱 발전시켜서 곡선이 먼저이고 그것에 의하여 함수가 정하여지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 함수의 그래프의 역사
함수의 역사
함수야 말로 우리의 주변 현상의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는 법칙이나 규칙을 연구 표현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함수를 좌표평면에서 그래프로 나타내기를 시도한 사람은 데카르트(Descartes, R. 1596-1650)이다. 그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기하학과 해석학을 하나로 묶는 오늘날의 해석기하학을 창시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기하학적 내용을 대수적 방정식으로 나타내어 그 결과를 기하학적으로 다시 번역하는 것이다. 또한 함수의 개념을 명확히 곡선의 방정식으로 나타내는 획기적인 표현법을 마련한 것이다. 이것의 본질은 좌표 (x,y)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직선에 의한 양수와 음수를 표현함으로써 기하학과 대수학이라는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수적 방정식을 그래프로 나타내어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다.
2. 1차함수와 2차함수의 역사
갈릴레오(Galileo, 1564-1642)는 여러 가지 운동을 연구하는 중에 "비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일차함수의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등가속도 운동과 같은 변화하는 물리적인 현상을 이차함수를 사용하여 시간과 거리의 관계로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갈릴레오의 관찰에 의하면 높이가 같고 기울기가 다른 경사면을 따라 어떤 물체가 내려올 때 걸리는 시간은 경사면의 길이에 비례한다. 또한 등가속도 운동을 하는 물체가 움직인 거리는 그 거리까지 움직이는데 걸린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이것을 식으로 표현하면 시간을 t , 경사면의 길이를 m , 거리를 s라 할 때
t = am
s = bt^2(t의 제곱)
으로 나타낼 수 있다(a, b : 상수). 이것이 1차함수, 2차함수의 실제적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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