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로아(Galois Evariste 1811.10.25~1832. 5.31)

수학자 2013. 11. 18. 23:43

 

 

 

 

 

갈로아(Galois Evariste 1811.10.25~1832. 5.31)

프랑스의 천재적 수학
群의 생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소수차의 기약방정식이
가감승제와 거듭제곱근을 써서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조건을 찾아냈다.
그의 업적은 21세 때 연애사건으로 인한 결투(죽음)의 전야 친구 Auguste Chevalier에게
보내는 서신에 씌여있다.

분방한 천재로서 바보스러운 행동에 몸을 내 던진 자기만족족인 교육자나 뻔뻔스러운 정치가,
자만심 많은 학자들에 대해 경종이 될 수 있는 수학

1811년 10월 25일
파리 교외 Bourg-la-Reine(부르 라 레느)에서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났다.
갈루아 생애의 처음 11년은 교양도 있고 철학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법률가 출신의 어머니 밑
에서 정있고 사랑받는 생활로 행복했다.

1823년(12세)때
파리의 루이 르 그랑 고등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기운이 완연한 시대여서
그다지 좋지 못한 환경에서 전제의 실상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 더 해 공부에 흥미를 잃어 버렸다.
그 와중에도 르장드르의 기하학을 독파하여 초등기하학을 정복하였고 당시의 대수학책을 창조적인 필치가 결여 된 책이라 생각하여 무시하고 라그랑주 학자에게 직접 대수학을 배우고 대수학의 체계를 정립하였다.
‘평범한 수업은 수학의 천재에게는 쓸데 없는 것이었고 참다운 수학을 위해서는 불필요 하기도 했다.’ 거의 머리속에서 어려운 수학 탐구를 해 치우는 갈루아의 재능은 교사나 시험관에게는 알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를 ‘참을 수 없을 만큼 독창성을 ...’ ‘구원 하기 어려울 만큼 건방지다.’ ‘수학적 광기가 그를 사로잡고 있다. 그를 수학만 하도록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라고 한 교사들의 말이 의미가 있다.

1827년(16세)
자기 나름대로 수학을 하던 갈루아는 1827년(16세) 자신의 수학적 능력이 인정되고 최대한
발휘하려는 의도에서 파리 고등 이공과학교에 입학시험을 치루었으나 실패한다.
이를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후에 ‘지력이 뛰어난 수험새생이 지력이 떨어지는 시험관에 걸려서 떨어 졌다. ....’ 라고 지적한 경우도 있다.

1828년(17세)
자기를 이해해 주는 루이 르 그랑 학교 교사 루이 폴 에멜 리샤르를 만나 공부를 하면서 여러
가지 연구에 힘을 쓴 결과

1829년 3월 1일
갈루아는 循環連分數(continued fractions)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여 급우들에게 본인이 독창적인 수학자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또, 갈루아는 그때 까자의 중요한 논문을 정리(方程式論에 관한 논문)해서 프랑스 科學院에 제출 하였지만 심사관 코시가 그 논문뿐만 아니라 논문의 요약 마저 잃어 버렸기 때문에 발표되지는 못 하였다. 이러한 이유등으로 사회 전체에 증오를 느끼게 된다.

1829년(18세)
또 두가지 불행이 그 에게 닥쳐온다.
첫째, 두 번째 파리 고등 이공과학교에 입학시험 - 머리속에서 연구하는 갈루아와 칠판앞에서 의 시험 - 실패하여 이 학교와는 인연이 없어 진다.
둘째,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 - 반 승려 투쟁으로 인한 승려들의 음모등으로 -이로 인하여
갈루아는 무슨 일이든 의심하고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 Ecole Polytechnique의 입학시험에는 실패하고 Ecole Normal에 입학했다.

1830년(19세) 2월
갈루아는 큰 상을 받을 목적으로 세가지 논문을 써서 학사원에 보냈으나 역시 분실되는 사건이 생긴다. 갈루아는 이 논문을 ‘나는 많은 수학자들의 연구를 단념시킬 만한 연구 ... ’라 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입증 되어 진다.
‘논문의 원고는 학사원 간사 앞으로 확실히 보내졌다. 간사는 검토하기 위해 집으로 가져갔으나 그것을 볼 틈도 없이 죽어 버렸다. 죽은 후 논문을 찾아 보았으나 그것은 흔적도 없었다.’
이를 우발적이라고 보다 어떤 숙명적인 것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 갈루아의 증오는 쌓여서 결국 공화주의 편에 서서 정치에 뛰어 들게 되었고 금지된 과격주의자로 나아간다.

1830년 7월
- 7월 혁명이 터지자 갈루아는 환호 했다.
그는 대중의 권리를 격렬히 옹호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교장의 기회주의, 학교 급우들의 굴욕적인 무기력 등을 비난하는 글을 학교 신문에 실어 이로 인하여 퇴교 처분을 받는다.
즉, 정치운동에 참가 했다가 퇴학

이후 국민병 포병대에 들어 갔다. 여기에서도 수학을 포기하지 않고 최후의 필사적인 시도로서 방정식에 관한 일반적인 해법에 관한 논문(‘갈루아 이론’)을 학사원에 보냈으나 ‘이해 하기 어려운 논문’이라는 것으로 끝 이었다. 이에 대해 갈루아는 ‘인민을 궐기 시키는 데 생명이 필요 하다면 이몸을 바쳐도 좋다’라고 썼다.

1831년 5월 19일
그에게 결정적인 날이 되었다.
포병대에 대한 해산명령에 항의하기 위해 모인 젊은 병사들의 술 자리에서 현세를 비난하는 ‘루이 필립을 위해 건배, 변절하는 새벽에 !’라는 구호로 축배를 든 것을 계기로 다음날 체포되어 생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변호인의 적절한 변호와 법정에서 정치적 부정의 공격 등을 격렬히 비난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관은 사리를 분별해서 인지 무죄판결을 받는다.

1831년 7월14일
당국의 눈에 ‘위험분자’로 비쳤기에 고발도 없이 구금되어 죄 아니 죄(당시 해산된 포병 군복 불법으로 착용)로 유죄 판결을 받아 6개월의 금고를 받아 생 펠리지 감옥에서 복역 하다가 1832년 콜레라의 만연으로 3월 16일 병원으로 옮겨 졌으며 외출이 허락되어 바깥 세상을 볼 기회가 자주 있었으며 이래서 일어난 일이 그의 생애에 단 한 번 있었전 연애사건이다. 천한여자에게 끌리게 되고 격렬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가 마침내 연애에 대해 그리고 자기와 그 여자에 대해서 혐오를 느꼈다. 이후 1832년 5월 29일 석방되었다.

그는 석방되자 곧 정치적인 적과 충돌 했다. 이들 ‘애국자’들은 시종 결투를 요구하기 마련이었고 불우한 갈루아가 ‘명예’문제로 여기에 걸려 들었던 것이다.

1832년 5월29일자 ‘모든 공화주의자 에게 고함’이라는 편지를 보면
‘내가 조국 이외의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죽더라도 애국자 여러분이나 친구 여러분은 비난하지 말라. 나는 염치없는 요부의 덫에 걸려 죽는다. 내가 죽는 것은 하잘 것 없는 싸움이다. ...’
또 다른 편지에는 ‘나는 두 애국자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거부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 모든 방법을 다해 타협하고자 노력해 본 끝에 결투에 나섰다는 것을 증언해 주기를 바란다. ... 끝까지 친구로서 죽는다...’ 이상이 갈루아가 남긴 최후의 말이다.

두 번이나 투옥 되었다가 가출옥 중, 연애사건으로 결투를 해서 겨우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결투하기 전날밤 그는 죽음을 예견하고 친구인 A. Chevalier에게
자기가 연구한 내용의 대강을 써서 남겼다.
위의 편지를 쓰기전에 그 날 밤 새도록 학술상의 유서를 쓰는 데 몰두하고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지나가는 몇 시간을 지낸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죽음을 예감하고 달아 오르는 두뇌를 가지고 조금이라고 업적을 남기려고 시간과 경쟁하면서 쓰고 또 썼다.

후에 J. Liouville이 이 원고와 稿種(고종)들을 정리하여
“J. Math. Purses Appl.,11”에 게재했다.
그것은 群의 개념을 도입하고 대수방정식에 관한 Galois이론을 실질적으로
포함한 내용이었으며, 마찬가지의 생각을 Abel 積分의 문제에도
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832년 5월31일 이른아침 갈루아는 ‘명예의 들판’에서 적과 대결 하였다. 결투는 25보 간격에서 피스톨로 행해졌다. 갈루아는 배를 관통당하여 후에 병원으로 옮겨 졌으나 결국은 21세의 나이로 죽었다.
그는 남쪽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거기에 에바리스트 갈루아의 묘는 흔적도 없다.
그의 영원한 기념비는 전집이다. 더구나 그것은 겨우 60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갈로아의 이론[Galois Theory]
1824년 아벨은 일반적인 5차이상의 방정식을 사칙과 거듭제곱으로 푸는 일, 즉 대수적으로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831년 갈로아는 根 사이의 치환군과 數体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주목하고 대수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풀리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구하여 대수방정식의 대수적인 해의 존재에 관한 연구에 결정적인 해답을 주었다. 갈로아의 연구는 대수학의 가장 아름다운 이론의 하나로서 갈루아의 이론이라 불린다.
‘소수 차수의 기약 방정식이 근 기호 만으로 풀 수 있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그 모든 근이 그 중 두 개의 유리함수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학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학자 요약  (0) 2014.10.22
아이작 뉴턴 경(Sir Isaac Newton)  (0) 2013.11.20
그리스의 종교가·철학자·수학자. 피타고라스  (0) 2013.11.20
posted by Kirakirat